명량해전의 진실

Posted by 천군 독수리
2014. 8. 3. 17:36 영화

                                           명량 해전의 진실

 

이순신이 독자적으로 치룬 유일한 전쟁이 명량해전이다. 한산대첩 등 그 외 알려진 전투의 대부분은 원균, 이억기와 합동작전이었으며 마지막 노량해전은 명군과 치룬 전쟁이었다. 내가 명량해전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 놀라운 성과 때문이다. 이순신이 독자적으로 치루어 거둔 놀라운 성과 때문에 영웅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이 해전은 모든 게 불투명하다. 조선수군은 12~13척이 분명한데, 일본군 측은 133척이라고도 하고, 333척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500척이라고도 한다. 코흘리개 아이들도 다 알 정도로 잘 알려진 이순신의 대표적인 전투에서 적군의 규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부터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게다가 전투를 벌인 장소마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명량인 것은 분명한데 실제 어느 바다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인지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바로 ‘쇠줄’ 때문이다. 단 12척의 배로 수백 척에 달하는 적선과 맞붙어 승리한 결정적인 전법은 이순신이 울돌목이란 곳에 ‘쇠줄‘을 설치한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게 말이 좀 안 맞다는 이견이 있다.


울돌목이란 곳은 현재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있는 곳으로 화원반도와 진도사이를 흐르는 좁은 해협으로 수로의 폭이 썰물 때 180미터에서 밀물 때 320미터까지 변화하는 등 조수가 빠르며 해저가 불규칙하여 '바다가 울며 돌아나간다 '하여 명량(鳴樑), 혹은 울돌목 이라고도 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현지를 방문해본 일부 해양학자들이 당시 해양공법상 이 거친 바다에 ‘쇠줄’을 연결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며 허구성을 내세운 것이다. 그들은 설사 이순신이 현재에도 알 수 없는 기가 막힌 공법을 이용해서 설치했다 해도 그 엄청난 양의 쇠를 녹이고, 함선을 엮을 정도로 튼튼하게 줄을 만들고, 또 수백 미터에 달하는 해협을 연결해서 설치하는 기간이 최소한 수년은 족히 걸렸을 거라는 것이다.


건데, 이순신은 1597년 8월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한 달만인 그해 9월에 명량해전을 치루게 된다. 과연 이순신은 한 달만에 무슨 재주로 해협을 가로지르는 쇠줄을 만들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그 기간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남아있는 병선을 거두어오고 패전으로 숨어있는 병사들을 수습하기 바쁜 기간이었는데. 그리고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에도 이 기간동안 쇠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자 명량에서의 대승을 주장하던 역사학자들은 실제 전투장소는 울돌목이 아니고 벽파진, 우수영앞바다 였다고 우기기까지 하는 판국이다.

 

이 모든 것이 명확하지 못하기에 임진왜란의 3대 대첩에 명량해전이 포함되지 못하고 한산도해전이 들어간 것이다. 조선수군 97척의 배로 일본군 70여척 중 40여척을 불사른 게 한산해전이고, 고작 12척의 배로 일본군 수백 척을 침몰시키고 200명의 인원으로 1만8천명의 일본군을 몰살시킨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인 데도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조선왕조실록에 들어가 참고문헌을 살펴보니 이런 기록이 있었다.


선수 31권,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1일 기축

통제사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을 죽이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 마다시(麻多時)를 죽였다.

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병선을 수습하여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배를 타고 피난해 있던 연해(沿海)의 사민(士民)들이 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였다. 순신은 길을 나누어 그들을 불러모아 군대 후면에 있으면서 군사의 형세를 돕도록 했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인데,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범하려고 하여, 벽파정 아래에서 접전하게 되었다. 순신은 12척의 배에다 대포를 싣고는 조수를 타고 순류(順流)하여 공격하니, 적이 패주(敗走)하였으므로, 수군의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실록을 해석해보자면 대충 이렇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부임하자 일본군 측에서 마다시 선단을 보내어 정찰을 나선 모양이다. 그러자 이순신은 일본함선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물살이 센 벽파진 일대에 바다를 가로막고 진을 치고 있다가 왜적 주선을 향해 대포를 쏘니 적장 마다시가 사망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더 싸울 생각을 않고 철수를 했고, 일본군 대선단이 도주를 하자 조선수군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는 내용이다.

 

그걸 후세의 박정희때 역사학자들이 부풀려서 마치 당시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200여척의 일본군을 대파한 것으로 묘사했고, 그걸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들이 작품상 필요에 의해 더욱 부풀려서 오늘의 '명량대전'이 된 모양이다.

 

참고로 선조실록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한산도해전에 대해서는 임금과 대신들 간에 이순신과 이억기, 원균 중에 누구의 공이 가장 많은가 하는 문제로 논공행상이 분분하지만 이 전투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학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한산해전보다 더욱더 엄청난 전과를 거둔 전투였기에 조정은 물론 조선8도가 난리가 났을 터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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